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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깥은 여름.
    각종리뷰/마음이 즐거운 2018. 2. 19.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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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애란 작가님의 단편 모음집, "바깥은 여름"은 기대했던것 보다도 훨씬 좋았다.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그냥 넘길 수 없어서였다.

    한 문장, 한 문장 읽을 때마다 멈칫하게 했고, 생각하게 했다.

    한 글자, 한 글자에 녹아 있는 삶에 대한 통찰력과 그 표현력이 부러웠고, 또 감탄이 절로 나왔다.


    다음은 내가 이 소설에서 특별히 아끼는 문장들.

    (그러니까.. 이 소설을 일독할 때 특별히 아끼게 됐던 문장들..

    다시 읽으면 또 다른 문장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까?)


    어떤 문장은 특별한 이유때문에 줄을 긋게 되었다.

    그런데 어떤 문장은 나도 모르는 새에 줄을 긋고 있었다.



    그렇게 사소하고 시시한 하루가 쌓여 계절이 되고, 계절이 쌓여 인생이 된다는 걸 배웠다.

    그러니까 어제와 같은 하루, 아주 긴 하루, 아내 말대로라면 '다 엉망이 되어버린' 하루를.

    가끔은 사람들이 '시간'이라 부르는 뭔가 '빨리 감기'한 필름마냥 스쳐가는 기분이 들었다.

    풍경이, 계절이, 세상이 우리만 빼고 자전하는 듯한.

    점점 그 폭을 좁혀 소용돌이를 만든 뒤 우리 가족을 삼키려는 것처럼 보였다.

    꽃이 피고 바람이 부는 이유도, 눈이 녹고 새순이 돋는 까닭도 모두 그 때문인 것 같았다. 시간이 누군가를 일방적으로 편드는 듯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앞으로도 절대 일어나지 않을 터였다. 그 단순한 사실이 가슴을 아프게 후벼팠다. 나는 결국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부엌 바닥으로 굵은 눈물방울이 툭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 순간조차 손에서 벽지를 놓을 수 없어, 그렇다고 놓지 않을 수도 없어 두 팔을 든 채 벌서듯 서 있었다. 물먹은 풀이 내 몸에서 나오는 고름처럼 아래로 후드득 떨어졌다. 한파가 오려면 아직 멀었는데 온몸이 후들후들 떨렸다. 두 팔이 바들바들 떨렸다.



    빈번히 오염되고 타인과의 교제에 자주 실패해야 건강해질 수 있었다. 물론 가끔 회복될 수 없는 실패도 있었지만, 내가 아는 한 그런 일을 겪지 않은 영은 없었다.


    이 안에서 어떤 이들은 고독 때문에, 또 어떤 이들은 고독을 예상하는 고독 때문에 조금씩 미쳐갔다.


    언젠가 만나게 될, 당장은 뭐라 일러야 할지 모르는 상실의 이름을 미리 불러 세우는 소리였는지 몰랐다.


    타인이 아닌 자신의 도덕성에 상처 입은 얼굴로 놀란 듯 즐거워하고 있었다. 나도 잘 아는 즐거움이었다.


    손에 스마트폰이 아닌 스노볼을 쥔 기분이었다. 유리 볼 안에선 하얀 눈보라가 흩날리는데, 구 바깥은 온통 여름인.

    생각했다. 볼 안에선 하얀 눈이 흩날리는데 구 바깥은 온통 여름일 누군가의 시차를 상상했다.


    풍경이 더이상 풍경일 수 없을 때, 나도 그 풍경의 일부라는 생각이 든 순간 생긴 불안이었다.


    그럴 땐 '과거'가 지나가고 사라지는게 아니라 차오르고 새어나오는 거란 생각이 들었다. 살면서 나를 지나간 사람, 내가 경험한 시간, 감내한 감정들이 지금 내 눈빛에 관여하고, 인상에 참여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표정의 양식으로, 분위기의 형태로 남아 내장 깊숙한 곳에서 공기처럼 배어 나왔다. 어떤 사건 후 뭔가 간명하게 정리할 수 없는 감정을 불만족스럽게 요약하고 나면 특히 그랬다. '그 일' 이후 나는 내 인상이 미묘하게 바뀐 걸 알았다. 그럴 땐 정말 내가 내 과거를 '먹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소화는, 배치는 지금도 진행중이었다.


    총기 흐려진 눈, 주관과 편견이 쌓인 입매, 경험에 의지하는 동시에 체험에 갇힌 인상을 보았을 거다.


    당신이 무언가 가뿐하게 요약하고 판정할 때마다 묘한 반발심을 느꼈다. 어느 땐 그게 타인을 가장 쉬운 방식으로 이해하는, 한 개인의 역사와 무게, 맥락과 분투를 생략하는 너무 예쁜 합리성처럼 보여서, 이 답답하고 지루한 소도시에서 나부터가 그 합리성에 꽤 목말라 있으면서 그랬다.



    아니라 각자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이 일어나기도 해. 서로 고유한 존재방식과 중력 때문에. 안 만나는게 아니라 만날 수 없는 거야. 맹렬한 속도로 지구를 비껴가는 행성처럼. 수학적 원리에 의해 어마어마한 잠재적 사건 두 개가 스치는 거지. 웅장하고 고유하게 휙. 어느 땐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강렬하고 빠른 속도로 휙. 그렇지만 각자 내부에 무언가가 타서 없어졌다는건 알아. 스쳤지만 탄거야. 스치느라고. 부딪쳤으면 부서졌을 텐데. 지나치면서 연소된거지. 어른이란 그런 그을음이 많은 사람인지도 모르겠구나. 그 검댕이 자기 내부에 자신만이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암호를 남긴. 상대가 한 말이 아닌, 하지 않은 말에 대해 의문과 경외를 동시에 갖는.


    '이해'는 품이 드는 일이라, 자리에 누울 땐 벗는 모자처럼 피곤하면 제일 먼저 집어던지게 돼 있거든.


    남편이 세상을 뜬 뒤 내가 끄는 발 소리, 내가 쓰는 물 소리, 내가 닫는 문 소리가 크다는 걸 알았다. 물론 그 중 가장 큰 건 내 '말소리' 그리고 '생각의 소리'였다. 상대가 없어, 상대를 향해 뻗어가지 못한 시시하고 일상적인 말들이 입가에 어색하게 맴돌았다. 두 사람만 쓰던, 두 사람이 만든 유행어, 맞장구의 패턴, 침대 속 밀담과 험담, 언제까지 계속될 것 같던 잔소리, 농담과 다독임이 온종일 집 안을 떠다녔다. 유리벽에 대가리를 박고 죽는 새처럼 번번이 당신의 부재에 부딪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때야 나는 바보같이 '아, 그 사람, 이제 여기 없지......'라는 사실을 처음 안 듯 깨달았다.


    에든버러에서 나는 시간을 아끼거나 낭비하지 않았다. 도랑 위에 쌀드물 버리듯 그냥 흘려보냈다. 시간이 나를 가라앉히거나 쓸어 보내지 못할 유속으로, 딱 그만큼의 힘으로 지나가게 놔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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